자작나무숲
자작나무숲
  • 나무신문
  • 승인 2014.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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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 자작나무숲은 하얗다
바다 앞에 서면 세상을 잊는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은 등 뒤의 세상을 더 멀리 밀어내고 파도는 세상 소식을 덮는다. 일상은 새해와 함께 또 시작되지만 하얀 나무가 숲을 이룬 자작나무숲에서 또 한 번 세상으로 가는 길을 지운다. 

 

겨울바다
남자 넷이 모여 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일은 술을 먹는 거다. 술자리 화제는 일과 정치와 여자와 가족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는 쉽게 하지 못하다가 새벽이 될 때쯤 간신히 한 마디 꺼내지만 술에 묻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을 깨운 것은 핸드폰 알람이었다. 겨울바다로 가자고 약속한 시간에 맞춰 여의도로 나갔다. 어제의 그 용사들이 다시 모여 출발!
네 명의 남자가 겨울이면 매년 한 번 씩 찾아가는 바다가 있다. 갯바위가 바다로 머리를 내밀고 바다는 부채처럼 백사장을 쓸어 올리고 있다.

▲ 강릉 사천해변 파도가 갯바위를 덮친다
한 명은 가게에서 낚싯대를 빌려 갯바위 위에 섰다. 둘은 민박집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빤다. 나는 백사장을 어슬렁거린다.

아무도 서로를 부르지 않는다. 바다를 대하는 각자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람이 거세지고 파도는 높아진다. 갯바위에 선 한 명을 파도가 덮친다. 그는 파도를 피하지 않았다. 담배를 피던 둘은 어디론가 가고 없다. 나는 갈매기 무리 옆에서 어슬렁거린다.

수평선 부근 하늘이 울긋불긋 요동을 치더니 금세 숙연해진다. 어둠이 바다를 누르고 파도는 더 깊게 해안선을 밀어낸다. 바람이 등 뒤 세상을 더 멀리 밀어내고 파도는 세상 소식을 끊는다.

가로등이 빛날 때 민박집 1층 가게로 돌아갔다.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던 한 명은 이미 가게에 자리를 틀고 앉아 파도에 젖은 옷을 말린다. 사라졌던 두 명은 품에 상자를 안고 돌아왔다.

상자에는 먹을 것들이 가득했다. 회 두 접시, 모듬전과 튀김 한 박스, 닭강정, 매운탕재료들, 그리고 술 술 술…

바다 앞에서 머리와 가슴을 지우고 있는 사이에 둘은 오늘 밤 먹을 것 걱정에 인근 항구에 다녀온 것이다.

네 명의 남자는 어제 새벽 가물가물하던 기억에 필름을 붙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밤은 어제처럼 깊어지고 새벽은 금세 왔다. 이야기는 어제 새벽처럼 끝났다. 하룻밤 동안 남자들 마음을 쓸어준 건 겨울바다였다.

 

▲ 강릉 중앙시장 소머리국밥
강릉의 겨울 맛
동해의 겨울별미 도루묵찌개와 양미리조림이 아침상에 올라왔다. 두 생선은 요리를 잘 해야 맛이 산다. 특히 도루묵찌개는 맛내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먹었던 그 집도 입맛 당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오히려 양미리조림이 입에 착착 감긴다.

푸짐한 아침상을 물리고 주문진항을 배회했다. 새벽 경매는 끝난 지 오래다. 항구는 깨끗했다. 배는 항구에 가득했고 갈매기만 분주하게 항구 위를 날다가 뱃전에 내려앉는다.

바닷가 길을 달리다가 오징어를 널어놓은 작은 항구 앞에 차를 세우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백사장과 도로를 구분해 놓은 시멘트 분리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남은 술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빠져나가면서 마지막 술 향기를 코끝에 퍼뜨린다. 몸도 마음도 나른해진다. 차는 속도를 줄여 바닷가 도로를 산책하듯 달린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도착한 곳은 강릉 중앙시장이었다. 강릉 중앙시장은 어묵 떡갈비 닭강정 매운탕 소머리국밥 등이 유명하다. 추운 겨울 보약 같은 국밥 한 그릇으로 의견을 모으는데 눈빛 하나면 충분했다.

 

원대리 자작나무숲길 3.2km
강릉을 벗어난 차는 한계령을 넘는다. 구불거리는 도로를 따라 고개를 올라가는 데 눈발이 날린다. 쌓인 눈은 녹다가 얼어서 빙판이다. 차가 걷는 속도로 간다. 준비 없이 맞이하는 눈 오는 빙판길, 한계령을 넘기 쉽지 않다. 한계령 정상 못 미쳐 좌회전, 필례약수터를 들렀다.
찝질하고 쏘는 맛의 약수가 낙엽 수북하게 쌓인 바닥 작은 옹달샘에 고였다.
잠시 눈을 붙인 사이 차는 임도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도착했다.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 필례약수
임도처럼 넓은 숲길 3.2km를 걸으면 자작나무숲이 나온다. 가는 길 가 숲도 온통 자작나무 숲이다.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 이어진다. 등에 땀이 구른다. 숲속 바람은 차가워서 머리가 띵하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자작나무 하얀 숲이 우거졌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저 아래 구불거리는 길이 또 어디론가 이어진다.

자작나무숲은 25헥타르(약 7만5600평)다. 그 넓은 산이 자작나무숲이다. 그곳에 길을 내고 숲을 가꾼 것이다.

자작나무숲은 하얗다. 멀리서보면 빗줄기가 땅에 박히는 것 같다. 짜작짜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얀 숲을 거닌다. 숲 바닥에 자작나무로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벗어나면 어디나 길인 동시에 길이 아니다. 길을 벗어나 길 아닌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더 깊게 들어가면 하얀 숲이 나를 삼킬 것 같았다.

땅에 쌓인 나무껍질과 낙엽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하얀 숲은 지우고 있었다. 자작나무숲에 가면 잠시 길을 잃어도 좋겠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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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