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아이들
골목길 아이들
  • 나무신문
  • 승인 201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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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전남 나주 영산포 일대

▲ 영산포 마을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고 놀고 있다
강에서 시작된 마을은 언덕 꼭대기까지 이어졌다. 나무가 있어야 할 언덕에 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밤에도 불이 켜지지 않은 창들은 듬성듬성 어둠을 삼키고 있었다. 산동네는 낮에도 어두워보였다. 언덕 꼭대기에서 바라본 마을로 들어간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골목길에서 보석 같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 영산포 마을 밤골목
포구의 밤
흐린 하늘 아래 흐르는 강물이 지쳐 보인다. 언덕 위 다닥다닥 붙은 집 창문에 하나 둘 씩 불이 켜진다. 어둠이 내리는 강둑을 걷는다. 사람 없는 길에 강비린내를 품은 바람만 불어간다. 나와 영산포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사람 없는 거리에서 식당불빛을 따라 걷다가 영일복집으로 들어섰다. 50년 전통의 식당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인다.

메뉴판에 적힌 메뉴는 복탕전골과 장어탕 두 개 뿐이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처음에는 장어탕만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30여 년 전부터 복탕전골을 메뉴에 올렸다. 그리고 여태껏 두 가지 음식만 판다.

그중 복탕전골을 찾는 손님이 90%가 넘는다. 장어탕을 찾는 손님은 거의 없지만 간혹 옛 맛이 그리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장어탕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다. 10%도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남겨 놓은 장어탕, 메뉴판에 적힌 장어탕이라는 글씨가 따듯해 보인다.

복탕전골이 펄펄 끓는다. 찹쌀가루를 넣은 국물이 진득하다. 뜨거운 국물 한 숟가락으로 찬바람 맞은 몸을 녹인다. 소주잔을 채우고 창밖 어둠을 바라본다. 손님은 나뿐이다. 길거리에 사람도 없다. ‘주인과 나 말고 이 시간에 깨어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침침하다.

몇 잔의 소주를 연거푸 마셨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몸이 녹는다. 복어의 찰진 살을 씹어 삼킨다. 혼자 맞이하는 타지의 밤은 늘 어색하다. 한 잔의 술에 몸이 녹고 마음이 풀리면 세상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영산강하구언이 생기기 전에는 만조와 간조에 따라 바닷물이 들고 났다. 가게 앞 강가에서 낚시로 장어와 복어도 잡았다. 영산강하구언이 생기고 주변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영산강은 죽었다. 사라진 포구에는 옛 영화를 지켜본 등대만이 남아 있다. 내일 날 밝으면 등대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나선 거리에 가로등만 밝다. 마을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 골목길 끝은 어둠이다. 부서진 창문틀이 골목에서 나뒹구는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 영산포 주변에 있는 영산동
영산포 등대와 동양척식회사 문서고
영산포 특산품 홍어로 만든 보리애국으로 해장을 할 참이었다. 식당이 10시부터 문을 열어서 늦은 아침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메뉴판에 적힌 홍어정식에 눈이 갔다. 홍어튀김 홍어전 홍어무침 홍어삼합 홍어찜 보리애국 등 다양한 홍어 요리를 맛 볼 수 있는 메뉴다.
그런데 홍어정식은 1인분 주문이 어렵다고 해서 먹고 싶은 요리를 몇 개 골라서 맞춤형 1인 정식 상을 주문했다.

톡 쏘는 맛이 홍어튀김이 가장 강하고 그 다음 홍어전 홍어찜 홍어삼합 홍어무침 순이다. 그중 홍어찜을 제외한 나머지 홍어요리가 상에 올랐다. 홍어 요리의 향연이 펼쳐지는 식탁이 황홀하다. 홍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영산포 홍어는 다르다. 차려준 모든 음식을 먹고 마지막으로 보리애국에 밥을 말아 한 뚝배기 먹었다. 보리애국은 보리순과 홍어 애(간)를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이다.

늦은 아침을 푸짐하게 즐긴 뒤에 도착한 곳은 영산포 등대다. 1915년 세워진 영산포 등대는 수위 관측과 등대의 기능을 겸했다. 영산강하구언이 생긴 뒤 더 이상 배가 오가지 않게 되면서 사실상 등대의 기능은 잃어버렸다. 1989년까지 수위관측시설로 사용되었다. 등록문화재 제129호다. 영산강등대 앞에 황포돛배를 타는 나루터가 있다.

영산강등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제강점기 나주 일대의 곡식과 물자를 수탈해간 동양척식회사의 문서고 건물이 남아있다.

동양척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한국의 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해 한국에 설립한 회사다. 1909년 동양척식회사 영산포지점을 설립하고 영산포 일대 농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1910년 7월 궁삼면(영산·세지·왕곡)에 있었던 토지 1만4552 정보와 묘지 1800 필지를 8만 엔에 강제로 매수하여 수탈하였으며 1916년 목포지점 영산포출장소를 설치하여 쌀 6만5000석, 보리 2000석, 목화 1만근을 관리했다.
현재 동양척식회사 문서고 옆에는 카페가 있다. 카페 마당에는 250년 된 팽나무가 서있다.

 

▲ 영산동에 있는 옛 일본식 주택. 장군의 아들 등 영화를 촬영했다
▲ 250년 된 팽나무
영산포 주변 산동네 골목길을 거닐다
팽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찬바람으로 얼굴을 씻는다. 영산포 주변 이창동과 영산동은 낮은 언덕과 구릉에 들어선 마을이다.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야 할 뒷동산 꼭대기까지 집들이 들어섰다.

이창동 일대 골목길을 돌아서 영산동으로 넘어갔다. 영산동주민센터 옆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아이들이 골목에서 공을 차며 놀고 있다. 얼마 만에 보는 골목길 아이들인가!

경남 통영 동피랑 마을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골목을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예뻤다. 그리고 7~8년 만에 나주 영산동 골목길을 누비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다.

수십 센티미터 눈이 내리던 날 윗동네 아랫동네 편을 갈라 골목길을 누비며 눈싸움을 했다. 동상 걸려 가려운 손가락 발가락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여름 소나기도 골목길을 달리는 우리를 막지는 못했다. 새총을 만들어 닭을 잡아먹겠다는 작당을 했던 언덕 꼭대기집 뒤에는 언제나 바람이 부는 풀밭이 있었다. 지금도 그 골목은 내 마음 속 가장 아늑한 곳에서 싱싱하게 살아있다.

골목은 그래서 언제나 따듯하다. 끊기고 막힐 것 같은 모퉁이를 돌고 돌면 길은 어느새 다른 골목과 만나고 그 골목에서 아이들은 뛰어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있어 골목이 빛난다.

 

▲ 홍어1번지 맞춤 1인 정식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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