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진에서 보낸 하루
정서진에서 보낸 하루
  • 나무신문
  • 승인 201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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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인천시 서구 오류동

▲ 24층 카페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시도 읽는 낯선 시간
눈보라 휘몰아치는 정서진의 하루는 낯설었다. 정서진, 서울 광화문에서 서쪽으로 수평 직선을 그으면 닿는 땅의 끝이다. 눈이 위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옆에서 몰아친다. 수평으로 총알처럼 날아간다. 정서진은 처음 보는 나를 그렇게 대했다.

 

오리불고기
올림픽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향한다. 익숙한 풍경이 지나고 낯선 풍경이 다가선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처음 보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답다. 창밖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풍경의 조각을 모아 첫인상을 완성한다.

지인에게 전부터 인천 계양구 벌말기사뷔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같이 가보자는 얘기도 몇 번 들었는데 그때마다 일정이 맞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시간이 맞아 벌말기사뷔페에 들렀다.

벌말기사뷔페는 들판 찻길 한쪽에 자리잡았다. 식당 안은 시골 중국집 같이 널널하다. 이른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몇 테이블 밖에 없다. 식당 한쪽에 밥과 반찬 국 메인메뉴인 오리불고기가 진열됐다.

김치와 고추장 등 기본 반찬을 주섬주섬 올린 뒤 뷔페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김밥과 잡채를 얹었다. 싱싱한 쌈 채소도 좋아하지만 잡채의 포만감을 생각해서 생략했다. 가마솥에 지은 밥을 한 주걱 담은 뒤 드디어 다가선 오리불고기, 가마솥에 담겨 있는 오리불고기를 양념과 기름이 고기에 잘 묻어나도록 휘휘 저은 뒤 한 주걱 떴다.

사실 개인적으로 오리고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훈제오리 오래백숙 오리탕 오리주물럭 유황진흙오리 등 시중에서 팔고 있는 오리요리는 한 번 쯤은 다 먹어 봤는데 입맛을 사로잡을 정도의 맛은 아니었다.

오리불고기가 삼삼하다. 고기와 양념과 기름이 따로 놀지 않는다. 오리고기 특유의 냄새도 없다. 입안에서 퍼지는 오리기름의 고소함이 진득한 양념과 함께 어우러져 감칠맛으로 남는다. 거기에 고기의 쫀득한 씹는 맛도 살아 있다. 불고기를 잘 볶았다. 이렇게 먹고 내는 돈은 6000원이다. 지인에게 언제 시간 맞으면 다시 한 번 오자고 했다. 오리고기 다시 먹고 싶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 눈이 총알처럼 수평으로 날아간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정서진
식당을 나설 때 사락사락 내리던 눈이 점점 굵어진다. 정서진 경인항통합운영센터에 도착하니까 눈발이 바람에 나부끼기 시작한다.

이미 쌓인 눈 위로 막 내린 눈이 덮힌다. 정서진 공원을 돌아볼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정서진 공원에는 정서진조형물과 선상체험공원 수상무대 해넘이전망대 등이 있다. 맑은 날 왔다면 청명한 하늘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원의 풍경이 괜찮을 것 같았다.

눈발이 점점 거세지더니 사선을 긋는다. 경인항통합운영센터 23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 통유리창으로 내다보는 풍경이 낯설다.

서해갑문과 여객선터미널 풍력발전기 영종대교 그리고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는 데 눈발 때문에 풍경이 흐릿하다. 눈을 머금은 먹구름에 세상이 컴컴하다.

이제 눈발은 수평으로 날린다. 총알 같은 눈발이 수평으로 날아간다. 훙훙거리는 바람소리가 을씨년스럽다. 어떨 때는 눈발이 솟구치는 바람을 타고 23층 높이를 넘어 하늘로 솟아오른다. 먼 데 풍경은 보이지 않고 가까운 시설물만 희미하게 보인다. 보이는 대부분은 수평으로 날아다니는 눈발이었다. 정서진은 처음 보는 나를 그렇게 대했다.

처음에는 풍경을 보지 못하고 카메라에 담지 못해 아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을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통쾌했다.

 

▲ 눈 녹은 물이 흐르는 창 밖으로 영종대교와 서해가 보인다
커피와 노을이 있었던 혼자만의 시간
23층 전망대 바로 위에 카페가 있다. 커피 한 잔하며 눈보라가 잦아들기를 기다린다. 유리창 앞에 놓인 소파가 아늑하다. 등받이와 양쪽 팔걸이 부분이 높아서 소파가 몸을 감싸는 느낌이다. 소파에 앉아 유리창 넘어 풍경을 바라본다.

번쩍이는 벼락을 따라 겨울 천둥이 공기를 찢는 사이 눈발은 더 하얗게 세상을 가린다. 느끼한 목소리의 오래된 외국가수가 부르는 옛 캐럴이 훈훈한 공기를 타고 흐르는 실내가 복고적이다.

▲ 눈이 그치고 서둘러 떠난 사람들이 남긴 노래가 경쾌하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혼자만의 시간 또한 처음이다. 눈보라는 가실 줄 모르고 커피는 식는다. 백열전구를 켜고 시집을 꺼낸다. 몇 편의 시를 읽고 나니 머릿속이 몽롱해진다. 잠깐 조는 사이 눈은 그치고 눈구름에 닫혔던 하늘이 바다 끝부터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눈 녹은 물이 창밖 풍경을 왜곡하는 이 공간이 비현실적이다. 서해가 보이는 24층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시집을 읽는 혼자만의 시간 또한 비현실적이다.

눈의 장막이 걷힌 하늘에는 노을을 이끌고 온 해가 영종대교 정수리 위에 걸렸다. 간혹 구름은 지났으나 노을빛은 가리지 못했다.

▲ 갯벌이 만든 곡선이 아름답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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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