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익는 가을
술 익는 가을
  • 나무신문
  • 승인 2013.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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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맛 있는 술
▲ 강원도 홍천 '동몽'

몇 번의 가을이 저 하늘을 지나야 마음을 놓겠는가! 휘발성 짙은 파란 하늘이 곧 사라져버릴 것 같아 해마다 가을이면 마음이 하늘을 붙잡는다. 언제나 착할 것 같은 대한민국 가을 하늘을 보고 있으면 그리움이 깊어진다. 순수한 웃음으로 순수한 믿음을 나누었던 하늘같은 사람들과 함께했던 술이 추억 속에서 익는다.  

강원도 홍천 ‘동몽’
강원도 홍천에서도 하루에 버스가 몇 번 안 들어가는 창동마을,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 2㎞는 더 걸어가야 술 빚는 집이 나온다.

한낮 그늘 없는 곳은 아직도 햇살이 따갑다. 먼 데 펼쳐진 풍경도 가벼워 보이고 발 옆에서 ‘똘똘똘’흐르는 맑은 도랑물 소리도 경쾌하다.

가을도 중반전으로 치닫는 산골 시골마을 사람 없는 길을 걸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파아란 가을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술 빚는 집에서 만난 술, ‘동몽’은 가을 산천의 맛을 닮았다. 전통주 ‘동몽’은 깊고 진하고 은은하다.

질 좋은 와인과 샴페인, 청주의 맛이 ‘동몽’ 한 잔에 모두 담겨있다. ‘동몽’은 전남 광주 송학곡자에서 만든 누룩과 홍천에서 나는 찹쌀과 단호박으로 빚는다.

약 5개월 정도 발효·숙성해야 맛이 재대로 난다. 발효?숙성의 과정 중 첫 번 째는 이른바 ‘보쌈실’ 과정이다. 옛날 구들장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씌우고 발효시켰던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27~28도를 유지하는 방에서 항아리에 담긴 술이 발효가 된다. 이곳에서 발효의 70%가 이루어진다.

그 다음에는 18도의 저온장기발효실에서 80일 가량 발효?숙성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도의 기온을 유지하는 저장실에서 60일 정도 지나면 맛이 완성된다.

‘동몽’은 와인잔에 따라 마셔야 제격이다. 고운 빛깔과 은은한 향기, 진하고 깊은 풍미로 시작한 맛의 향연이 입안 가득 퍼지며 풍부한 감칠맛을 낸다. 가을 하늘이 입 안에 가득 고인다. 

경기도 용인 민속촌 동동주와 더덕구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술은 동동주다. 주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밥알 동동 뜬 동동주가 아니라 들기름 빛깔이 난다. 집에서 빚기 때문에 대부분 소주병에 보관한다. 그것도 집안에 큰 잔치가 있어야 빚는다.

그런 동동주를 처음 만난 건 25년 전 쯤이다. 오래 전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 어머니 회갑연에 간 일이 있다.

시골마을 허름한 식당에서 잔치판이 벌어졌는데 잔치의 흥은 장구를 맨 기생이 돋우고 있었다. 장구가락에 얹힌 기생의 노래가락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람들은 그 흥에 흥을 더해 노래를 따라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그 잔치판이 참 잔치판 같았다.

▲ 경기도 용인 민속촌 내 장터 동동주와 더덕구이
아들 친구들이 왔다고 친구 어머님은 우리가 자리잡은 방에 찾아와서 일일이 잔을 채워주셨는데 그때 어머님이 따라주신 그 술이 바로 동동주였다.

그 자리에서 맛 본 동동주는 세계 최고의 술맛이었다. 동동주가 잔에 담기는 순간 은은한 술 향이 좁은 방에 퍼지고, 고개 돌려 마신 한 잔의 술맛에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그 술은 어머니께서 직접 담그신 동동주였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안 계시니 그 술맛을 어디에서 볼 수 있단 말인가.

세월은 흘렀고 우연한 기회에 찾아간 용인민속촌 안 장터 주막에서 옛날 친구 어머니의 동동주 맛과 약간 비슷한 동동주를 만났다. 친구 어머니의 동동주 맛은 아니더라도 멀지 않은 곳에 세계 최고의 맛과 풍미를 추억할 수 있는 동동주가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민속촌 장터주막 동동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안주는 더덕구이다.

술 익는 시간만큼 그리움도 깊어지려나! 시골마을 회갑잔치에서 동동주를 나누어 마시던 그 친구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제주 갯바위 해변 노천 술집
소주도 익는다. 오래 묵은 소주는 순수한 맛이다. 흔해빠진 소주 한 잔, 추억 속의 소주를 생각하면 아주 착해질 것 같다.
어느 날 남자 셋이 소주를 먹는다. 술이 취했고 며칠 뒤에 제주도에 가자는 이야기를 취중에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 된 약속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철저하게 지켜졌다.

며칠 뒤 이른 아침 세 명은 제주 공항에서 만났다. 한 명은 집에서 곱게 나와 도착 했고, 또 한 명은 밤을 새우며 일하다가 왔고, 또 한 명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막 술잔을 놓고 비행기를 탔단다.

그렇게 만난 제주의 어느 날, 제주의 공기는 순수했다. 사람 마음마저 깨끗하게 해주는 것 같다. 파도 부서지는 갯바위에서 그 순수한 공기를 마시며 해산물 안주에 즐기는 소주 한 잔은 파란 가을하늘처럼 상쾌하다. 

성산일출봉 아래 푸른 초원 목책을 따라가면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 아래에 해녀의 집이 있다.

우리는 해녀의 집이 있는 갯바위에서 제주 바다가 몰고 온 바람을 마음껏 맞으며 오전부터 소주잔을 기울였다.   

퇴적과 융기 침식의 과정을 거친 제주도 바닷가 절벽의 신비로운 풍경 앞으로 파란 바다가 펼쳐진다. 물결마다 빛나는 은파금파 눈부신 바다와 온몸을 휘감는 순수한 공기로 숨을 쉬며 마시는 한 잔 한 잔, 그리고 신선한 해산물들, 파도 소리 보다 크게 울려 퍼지는 우리들의 웃음소리. 

순수한 소주와 해산물 앞에서 만난 순수한 햇빛 순수한 바다 순수한 바람 순수한 공기 순수한 웃음 순수한 믿음. 그렇게 또 소주가 익는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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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