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역에서 딜쿠샤까지
광화문역에서 딜쿠샤까지
  • 나무신문
  • 승인 2013.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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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성곽 따라 걷기1

▲ 경희궁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한양 도성에 쌓은 성곽을 지금은 서울성곽이라 부른다. 약 18km 서울 성곽을 따라 걷는다. 성곽이 사라진 곳도 있고 사유지라 접근이 어려운 곳도 있으나 그런 곳은 근처 다른 길로 우회하며 걷는다. 서울성곽길 근처에 유명한 역사문화 명소도 있으니 성곽길 따라 옛 한양의 둘레길을 걸어볼만 하겠다.

 

사라진 왕궁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로 나와서 서대문 방향으로 걷는다. 새문안교회 앞을 지난다. 새문안교회 앞이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었던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다. 원각사가 있었던 곳을 알리는 표지석을 지나면 구세군회관빌딩이 나온다.

사실상 여기서부터 서울성곽을 따라 걷는 서울도성 걷기코스가 시작 된다. 구세군회관빌딩이 조선의 5대 궁궐이었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있었던 자리다.

경희궁은 조선 후기 왕들이 임시로 거처했던 이궁이다. 1617년(광해군9)에 창건하여 1620년(광해군12)에 완공했다. 처음에는 경덕궁이라고 했는데 1760년(영조36)에 경희궁으로 고쳐 불렀다. 도성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궐이라고도 했다. 경희궁에는 숙종과 영조가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경희궁에 대한 글과 글씨를 많이 남겼고 경희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세군회관 건물을 지나자마자 금천교가 보인다. 금천교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안에 흐르던 금천에 놓였던 다리로 1618년(광해군10)에 놓았다. 금천교는 홍예교로 두 개의 아치가 있다. 난간의 돌짐승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 경희궁 금천교
금천교부터 서울역사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이 시작된다. 서울역사박물관 밖 잔디밭에 여러 가지 석물들이 있는데 그 중 운현궁 일가의 묘소에 있던 석물도 있다.

운현궁의 연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동생인 은신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신군은 정치적인 이유로 17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귀양가서 죽었다. 후사가 없었지만 인평대군의 후손인 남연군이 그의 가계를 이었다. 남연군의 아들이 바로 흥선대원군이었고 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이 왕에 오르면서 임금의 본가가 운현궁이 된 것이다. 운현궁에서 온 석물은 은신군신도비와 은신군묘표, 석양, 석마, 장명등 등이 있다.

▲ 옛 경희궁 자리 중 일부 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다. 사진은 박물관 야외에 있는 석물들
서울역사박물관도 사실은 경희궁터였다. 경희궁 터는 지금 보다 훨씬 컸다. 현재 숭정문 숭정전 태령전 자정전만 복원 됐는데 사실은 이 밖에 덕유당 집경당 홍정당 회상전 융복전 상휘당 용무당 어조당 봉상루 용비루 지효합 양덕당 경현당 위성당 등이 있었던 꽤 큰 규모의 궁궐이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밖에 있는 전차 모형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나면 내일신문 건물이 나오고 그 뒤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보인다. 원래의 자리를 잃고 다른 곳에 지어진 궁궐의 정문을 통과한다. 금천교가 이곳에 없으니 걷는 발길이 허전하다.

숭정전 태령전 자정전 등을 돌아보고 숭정문을 나오면서 좌회전해서 궁궐 건물 옆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계단을 올라서면 궁궐의 측면, 기와지붕이 겹쳐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담장길을 따라 호젓하게 걸으며 복원된 경희궁 건물이 들어앉은 형국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빌딩숲 서울 도심에 이렇게 여유롭고 한적한 풍경이 있어 좋다.

 

▲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
내일신문 건물을 끼고 우회전해서 강북삼성병원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을 오른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교육청이 나오고 교육청을 지나서 오른쪽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그 길을 따르면 월암공원이 나온다. 서울성곽을 쌓았던 돌의 일부가 이곳에 남아 있고 그 위에 새롭게 서울성곽을 복원했다. 월암공원 아래에 이른바 국민 동요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살던 집이 있다.

홍난파가 살던 집은 1930년에 지어졌다. 지하 1층 지상 1층 붉은 벽돌집인데 독일계 선교사가 살던 집이었다.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근처에 독일인들이 많이 살았다 한다.

홍난파는 이곳에서 1935년에서 생을 마감한 1941년까지 살았다. 건물은 1층 동쪽에 있었던 두 개의 침실 벽을 터서 꾸민 홍난파 기념관 전시실을 제외하고는 홍난파가 살던 때 그 모양 그대로 남아 있다.  
4월~10월은 오전 11시~오후 5시, 11월~3월은 오전 11~오후 4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주말 및 공휴일은 휴관한다.

 

▲ 홍난파 가옥 내부

▲ 권율 장군 집터 표지석과 420년 된 은행나무
권율장군과 딜쿠샤
홍난파 가옥에서 나와서 더 올라가면 거대한 은행나무가 보인다. 은행나무 주변이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권율 장군의 집터다. 은행나무는 권율장군이 직접 심었다고 전한다.

권율 장군은 백사 이항복의 장인이었다. 현재 배화여고 뒤에 가면 바위절벽에 ‘필운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이 백사 이항복이 살던 집이었다. 백사 이항복은 장인인 권율 장군으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것이다. 권율 장군은 사위에게 필운대 집을 물려주고 은행나무가 있는 이곳으로 집을 옮겼을 것이다. 이 마을 이름이 행촌동이 된 것도 다 권율 장군의 은행나무 때문이었다.

권율 장군의 은행나무 앞에는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이곳이 ‘딜쿠샤’이다. ‘딜쿠샤’는 미국인 알버트 테일러가 1923년에 지은 집이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 등을 의미하는 데 이 건물 정초석에 ‘딜쿠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아마도 알버트 테일러가 집을 짓고 새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딜쿠샤 건물
▲ 딜쿠샤 건물 내부
▲ 딜쿠샤 건물 내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알버트 테일러는 언론인이었는데 일제의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최초로 세계로 전파했으며, 1919년 3.1 독립선언문을 입수해서 갓 태어난 아들의 침대 밑에 숨겨서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이런 이유로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1948에 사망하면서 한국 땅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에 따라 그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 서울시 교육청 지나 월암공원으로 올라가면 서울성곽이 나온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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