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나라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
사라진 나라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
  • 나무신문
  • 승인 201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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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충북 청주 근대문화유산 답사2

▲ 현풍곽씨 효자비
오늘 돌아본 근대문화유산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졌다. 역사를 배제하고 들여다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데 역사가 이입되면 가슴이 뻐근해진다. 오늘 나는 사라진 나라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우암산 푸른 숲을 넘어
청주 향교로 가는 길, 중앙초등학교 후문 모퉁이를 끼고 우회전 한다. 길 오른쪽에 예쁜 카페가 있고 카페 뒤에 우리예능원이 있다.

우리예능원 건물(등록문화재)은 1924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충북 지부장의 사택으로 건립됐다. 

작은 정원에 맥문동 꽃이 피었다. 건물을 덮은 키 큰 나무 아래에 아이들이 뛰어 다닌다. 예능원에 다니는 아이들인 것 같다. 건물 안에서는 악기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건물에서 새어나는 서툰 악기 소리가 공연장 무대 위에서 들리는 정갈한 연주 보다 더 빛난다.

향교로 걸어가는 길은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다. 적어도 50년은 넘어 보이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향교까지 이어지는 직선 도로 양 옆에 도열했다.

그 길을 걸어 도착한 향교, 홍살문을 지나 우암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으로 향한다. 우암산 기슭 향교 뒷동산은 낮지만 숲이 우거졌다. 하늘을 덮은 숲 아래 오솔길을 산책하듯 걷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암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향교로 가는 또 다른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향교로 가는 또 다른 길 쪽으로 걷는다. 그길로 가면 향교 뒷동네인 대성동이 나오고 대성동에서 탑동 방향으로 걷는다.  

 

▲ 노두의기념관
탑이 있어 탑동이라고 불리는 동네
탑대성동주민센터에 들러 마을 골목길까지 자세히 나온 지도를 얻고 직원에게 우리가 가야할 곳으로 가는 가장 빠른 골목길을 안내 받았다.

실핏줄 같이 퍼져 있는 골목길은 마땅한 이정표가 없기 때문에 말로 설명을 들어서는 길 찾기가 어렵다. 지도 위에 선을 그어 길을 확실하게 표시했다.

골목길을 이러저리 돌아다니며 탑동 현풍곽씨 효자비 건물에 도착했다. 효자비 뒤에는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의 작품으로 보이는 탑이 하나 있다. 이 탑으로 인해 동네 이름이 탑동이 된 것이다. 탑은 2층 기단의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1, 2, 3, 5층 지붕돌만 남아 있고 기단부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기단부가 없는 탑의 높이가 3미터가 넘는다.
효자비와 탑을 돌아보고 나오는 데 마당 여기저기 꽃이 피었다. 돌담 아래 피어난 꽃은 상사화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없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 할 때 흔히 등장하는 꽃이 바로 상사화다. 꽃에 깃든 이야기 때문인지 꽃이 예쁜데 서러워 보인다.

현풍곽씨 효자비와 탑이 있는 건물에서 약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동산교회가 있고 그 앞에 ‘양관’이라고 부르는 붉은색 벽돌 건물이 있다. 

 

▲ 동산교회 앞 양관 건물. 현재는 청주성서신학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붉은 벽돌 건물들
‘양관’이란 서양식 건물을 부르는 이름이다. 예전부터 동네 사람들이 ‘양관’으로 불러서 공식 이름이 ‘양관’이 된 것이다.

‘양관’은 동산교회 앞에 한 채가 있고 동산교회 뒤 일신여고 교내에 네 채가 더 있다. 동산교회 앞 건물은 1932년에 건립됐다. 당시 청주지역 선교사였던 부례선 목사가 충북 영동 지역 선교 도중에 장티푸스에 걸려 죽자 그의 부인이 미국에서 헌금을 걷어 그 돈으로 지었다.

건물의 대부분은 서양식 건축양식인데 데 지붕은 한옥 건축 양식을 따랐다. 지금은 함석으로 지붕을 했지만 그 이전에는 기와지붕이었다. 현재는 성서신학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신여고 교정에서 처음 보이는 ‘양관’은 노두의기념관이다. 이 건물은 1911년 미국 켄터키 주 위치타에 살던 매클렁 부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두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8백 달러를 희사해서 지었다. 이곳은 당시 소민병원 원장 노두의 의사가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여 선교사들이 모두 강제 출국 당할 때까지 살았던 건물이기도 하다.

노두의 기념관 뒤로 올라가면 선교비가 있고 선교비 뒤에 포사이드기념관이 있다. 이 건물은 ‘양관’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졌다. 1906년에 완성된 이 건물은 한국 전통건축 양식을 많이 차용했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포사이드 부부가 3천 달러를 보내와 짓게 됐다. 특히 이 건물은 옛날 순교자들이 갇혔던 형무소에서 가져온 화강석을 초석으로 해서 지었다.

민노아기념관은 1911년에 지어졌으며 충북 최초의 선교지도자 민노아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이다.

소민병원으로 사용하던 건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건물은 1908년 미국의 던컨 부인이 병원 건축을 위해 7천 달러를 희사해서 1912년에 완성했다. 청주 최초의 근대식병원이다. 청주 사람들은 이 병원을 소민병원이라고 불렀다. 소민병원은 진료실과 수술실을 갖추었고 병상이 20개였다.

 

쉬다 걷다 머물다, 게으른 발걸음으로 돌아본 청주의 근대문화유산 답사길에 노을이 깔린다. 1905년 그날 저녁도 오늘의 노을처럼 아름다웠으리라. 1905년 조선에 깃든 어둠은 제국의 권력으로 세계를 재단했던 미국과 영국 러시아 일본 등에 의해 깊어졌다.

1905년 맺은 미국과 일본의 밀약, 가쓰라태프트조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게 된다. 포츠머드 조약으로 러시아와 영국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게 된다.

오늘 돌아본 근대문화유산 건물들이 모두 그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역사를 배제하고 들여다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데 역사가 이입되면 가슴이 뻐근해진다.

문화 전파는 강대국에서 약소국으로 이루어지는 일방통행적인 면이 강하다지만 상호 보완적인 측면도 간과하지 못하는데, 한반도는 달랐다. 강대국에 의해 세계지도에서 민족의 정통과 국가가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오늘 나는 사라진 나라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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