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
벽초 홍명희
  • 나무신문
  • 승인 2013.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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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충북 괴산 홍명희 생가

▲ 홍명희 생가
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갑자기 몰려왔다 사라지는, 심상치 않은 먹구름 때문에 우중기행(雨中紀行)이 되지 않겠느냐는 걱정을 앞세우고 괴산 읍내에 첫발을 디뎠다. 다행히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파란 하늘 눈부신 햇살이 길 위에 뿌려지고 있었다.

이번 문학기행은 벽초 홍명희(1888~1968)의 흔적을 찾는 길이다.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1928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하역사소설을 연재한 예는 극히 드물다. 해방 직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소설 <임꺽정>은 조선시대 백정이었던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한 당시 일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잘 나타난 대하소설이다. 역사소설 대부분이 왕의 이야기이거나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투쟁을 그리기 일쑤인데 홍명희의 <임꺽정>은 백성들이 주인공이 된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도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금삼의 피> <세종대왕> 등을 쓴 역사소설의 거장 박종화 또한 홍명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좌·우익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던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간 홍명희는 북한의 부수상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게 됐고, 그 일로 말미암아 남한에서 얼마 전까지 홍명희의 문학적 업적과 생의 자취를 들추는 일은 금기였다.

1980년대 중후반, 월북 및 납북 작가의 작품 등이 해금 되면서 <임꺽정>도 우리나라에 소개돼 많은 인기를 끌었다. 

 

홍명희가 태어난 괴산읍 동부리 집
홍명희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괴산읍 동부리에 있다. 이 집은 홍명희는 물론이고 그의 아버지인 홍범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홍명희의 5대조부터 이 집에서 살았다.

특히 홍명희의 아버지인 홍범식은 금산군수를 지낼 무렵인 1910년 일본이 강제로 나라를 빼앗자 자결로써 우국충정의 뜻을 남기기도 했다. 홍명희 생가 옆에 그의 뜻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홍명희 생가가 지어진 것은 1728년 무렵 영조 때이다. 그 이후 1800년 대 중반에 증축됐다. 그리고 최근에 1000평 정도 되는 터에 생가를 복원했다. 본채는 ㄷ자 건물 두 채가 겹쳐져서 ㅁ자 건물을 이루고 있다. 좌우대칭으로 중부지방 사대부 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췄다. 특이한 것은 두 채의 건물 가운데 남쪽 건물을 낮게 지어 마당 가득 햇볕이 들게 했다는 점이다.

이 집은 건축사적인 중요성도 있지만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충북 최초의 만세운동의 본거지라는 측면에서도 문화재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홍명희는 1919년 3월 19일 괴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는데, 그 일을 준비한 곳이 동부리 집 사랑채였다.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됐다.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홍명희
안채 사랑채 장독대 광채 뒤주 김치광 대문채 등 생가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한옥의 운치를 즐긴다. 여름 한 낮의 더위도 한옥 대청마루에 부는 바람 앞에서는 견딜 만하다. 마지막으로 괴산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던 사랑채를 다시 한 번 들러본다.

그리고 생가 뒤 개심사라는 작은 절로 향한다. 생가 바로 뒤 언덕에 오르면 생가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곳에 개심사가 있었던 것이다.

몇 개 안 되는 절집 작은 절마당 텃밭에 상추며 고추, 가지가 싱싱하게 자랐다. 여름의 열기를 머금은 채소들은 여름처럼 강하게 자란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 보다 텃밭 여름 채소에 마음이 더 간다. 그렇게 절마당을 지나 생가가 잘 보일 것 같은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나뭇가지에 가려 생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비탈진 곳까지 자리를 옮겨 시야를 확보한다.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20여 미터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다. 갈 수 있는 곳까지 내려가 생가를 바라본다. 생가 앞으로 냇물이 흐르고 그 앞으로 괴산 읍내가 훤히 펼쳐진다.
다시 생가로 돌아와서 생가 앞 다리를 건너 우회전해서 조금 간다. 큰 길 왼쪽에 느티나무가 보인다. 그 나무 아래 만세운동유적비가 있다. 홍명희 등이 1919년 3월 19일 유적비가 세워진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시장이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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