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목장, 이영혁
중국 대목장, 이영혁
  • 박광윤 기자
  • 승인 2013.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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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木匠의 세계 28

 

이영혁(李永革)은 현재 자금성 고궁박물원 고건수선중심 주임으로 자금성의 수리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자금성 제1대 수리장인인 마진고, 제2대 수리장인인 대계추와 조숭무의 뒤를 이어 자금성 고건축 기술의 전승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자금성 고건수선중심 형성과정
1949년 중앙인민정부 문화부에서 고궁박물원을 접수할 당시, 고궁박물원 건축물 중 일부는 보수가 필요했지만 다행히 대규모 파괴는 없었다. 고궁박물원은 명청시대 궁궐건축의 정수를 보여주기 위해 외부형태는 원형 보존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1950년대는 신중국 건국 초기로 소규모 민영 건축회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1명의 십장工頭이 공종 별로 몇몇의 공장工匠을 모아 함께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해체하는 식이었다. 북경은 겨울이 너무 추워서 한겨울 3 ~ 4개월은 건축공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겨울이 되면 장인들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건축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다. 어떤 이들은 야채장수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보일러 수리나 도구 수리 등을 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와窩’라고 불렀다.

1960년대 고궁을 수리할 때에도 이러한 관행은 여전했다. 당시 고궁박물원의 부원장이었던 선사원單士元은 능력 있는 공장들이 겨울에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북경성 안에 있는 네 개의 구역四舊城 즉 서성西城, 동성東城, 숭문崇文, 현무玄武 지역에서 가장 능력 있는 원로급 공장 10명을 고궁박물원 상시 공정대工程隊로 임명했다. 이 때 모인 10명의 원로급 공장들과 그들의 제자들이 함께 공정대를 형성해 북경 고궁공정대의 제1세대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현재 북경 자금성 안에 있는 고궁수선중심의 전신이다.

10명의 원로 공장을 ‘고궁십로故宮十老 ’라고 부른다. 목작木作에는 두백당杜伯堂, 마진고馬進考, 목문화穆文華, 장문충張文忠 4명이 있었고 와작瓦作에는 주봉산周鳳山, 장국안張國安 2명이 유화작油畵作에는 장련경張連卿, 하문규何文奎 2명이 석작石作에는 유청헌劉淸憲, 유영장劉榮章 2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고건축의 8대작 8대 공종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와작, 목작, 유작油作(기름과 관련된 공사), 채화작彩畵作(단청), 표호작   糊作(도배관련 공사), 토작土作(흙과 관련된 공사), 탑재작   材作(비계 등 가설공사), 석작石作이 해당된다. 제1세대들은 사실상 1~2년 뒤에 모두 은퇴했고, 고궁십로의 제자들과 그 뒤에 중국 문화부에 속해있던 공정대가 고궁으로 합병되면서 들어온 사람들 등을 합한 제2세대가 실제적으로 고궁의 수선을 이끌었다. 제2세대 목작에는 대계추戴季秋와 조숭무趙崇茂 등이 있었다.

대계추와 조숭무는 1970년대와 1990년대 고궁을 이끌었던 대목장이다. 대계추는 1950년대 초에 고궁박물원에 입사해 마진고를 스승으로 모시고 기술을 전수받는다. 문화대혁명(1966 ~ 1976)이 거의 끝날 무렵 고궁박물원에서는 ‘고궁 수리 5년 내지 7년 계획’을 마련해 1975년과 1978년 사이에 약 300명 가량의 고궁 공정대를 모집한다. 이영혁은 바로 이 시기에 들어온 인물로 제3세대에 속한다. 이들은 제2세대를 스승으로 섬기며 일을 배웠다. 현재 제3세대 중 많은 사람들이 퇴직을 하고 약 100여 명만이 고궁박물원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 고궁에서는 건축과 관련 하여 14명의 인원을 뽑았는데 그들이 앞으로 고궁의 제4대를 형성할 것이다.

현재 자금성 고궁박물원의 건축 관련 부서는 고건부, 공정관리처, 고건수선중심 등 3개 부서로 나뉘어 있다. 고건부古建部는 자금성 고건축 보호계획을 수립하고 공사방안을 설계·감독·감리하며, 특히 고궁 고건축연구에 많은 힘을 쏟고 있는 부서이다. 공정관리처工程管理處는 고궁 내 보수공사와 관련해 도급을 줄 때 관리자로서 보수수리공사의 관리감독을 맡고 있다. 고건수선중심古建修繕中心은 고궁 내 중요한 보수공사를 직접 책임지고 시공하는 부서이며, 고건축기술을 교육 전승하는 일을 맡고 있다. 1975년 이영혁의 입사 당시에는 설계와 시공 그리고 관리감독을 고건수선중심에서 담당했으나, 1980년 중반부터 고건부와 공정관리처가 분리돼 각 분야의 전문성이 증가했다.

 

스승, 대계추와 조숭무
이영혁은 1955년 북경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971년에 군입대해 1975년에 전역했다. 당시에는 학교나 군대에서 직장을 배정해 주었고 이영혁 역시 몇몇 직장을 배정받았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북경의 건축 관련 회사에서 목공으로 종사하던 이영혁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목수의 길을 추천한다. 고궁은 북경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에 이영혁은 1975년 고궁에 지원하게 된다.
이영혁은 동료에 비해 목공기술을 훨씬 빨리 습득했다. 자신의 의

지와 상관없이 배정받아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목수의 길이었기에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이영혁은 목공기술의 스승으로 대계추戴季秋와 조숭무趙崇茂를 꼽는다. 대계추와 조숭무는 고궁 제2세대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대목작이었지만 서로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조숭무에게 처음 대목작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이영혁은 대계추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 조숭무 선생은 “세 명의 스승을 따르면 무예가 높다(人從三師武藝高)”는 말을 전하며, 대계추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라고 허락했다.

이영혁은 조숭무와 함께 대계추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게 되는 행운을 누리면서, 한 가지 일에 대해 두 스승의 설명과 해석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대계추 선생은 출근하지 않은 주말을 이용해 이영혁에게 고건축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거의 일년 동안 주말마다 이루어졌던 특별교육은 목경木經에서부터 시공 부호, 가공을 위한 먹선 그리는 법, 기둥·보·두공 맞춤 등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조숭무와 대계추 스승의 충실한 지도를 받은 이영혁은 1984년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고건수선중심의 전신인 고궁고건공정대故宮古建工程隊의 대장이 됐다. 이영혁은 고궁에 입사해 스승 조숭무와 대계추로부터 배운 지식을 꼼꼼이 기록해 두었다. 도구의 규격과 사용방법에서부터 장인들 사이의 약속 부호, 구조부재의 결구 및 가공 방법, 부재의 치수에 이르기까지 목조건축의 기본적인 내용이 적혀 있으며 심지어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언급한 내용도 있어 당시 대목장으로서 갖추어야 할 인성적인 교육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낱장 형식의 기록도 있는데, 이영혁 대목장이 두공, 추녀와 사래, 선자연, 서까래 등 각종 부재의 치수와 결구방법에 대한 것을 간략히 도해한 것으로 중국 목조건축의 기본적인 구법을 이해할 수 있다.
자료제공 _ 수원화성박물관(담당 학예팀 오선화 031.228.4209)
에디터 _ 박광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