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남북을 흐르는 무심천과 그 주변 지형은 변할 리 없지만 마을은 대부분 다 옛 모습을 잃었다. 하지만 옛날 마을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대성동이다.
충북 도청부터 대성동까지 이어지는 길은 옛 청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 답사의 길이며 조선시대 향교와 그 향교가 있던 마을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추억의 길이기도 하다.
충북 도청 본관 건물은 1937년에 완공되어 지금도 사용한다. 옛 건물의 사료 가치를 인정해서 근대문화유산에 등록됐다.
도청 본관 앞 뜰은 소박한 정원이다.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근대문화유산 답사길이 이곳부터 시작된다.
도청 건물을 보고 나와 중앙초등학교 쪽으로 간다. 초등학교 운동장 키 큰 나무가 학교의 역사를 말해준다. 일제강점기 때까지 치면 100년이 넘은 학교다.
중앙초등학교와 도청건물 사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삼거리가 나오고 청주향교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로 가면 근대문화유산 중 하나인 옛 도지사관사가 향교보다 먼저 나온다.
옛 도지사관사는 서양식 건물과 일본식 구옥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일본식 구옥의 미닫이문은 홍나무로 만든 것으로 건물을 처음 지을 때 그대로다.
서양식 건물은 전시관이다. 충북을 대표하는 문인 12명을 선정해서 그들의 생애와 작품의 특징을 알 수 있게 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가 테이블에 앉아 소곤소곤 얘기를 나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산책 나온 가족이 스마트폰으로 가족사진을 찍는다. 인근 동네에 사는 애들인 지 풀밭에 쪼그려 앉아 소꿉놀이를 한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모래알로 떡 해놓고 조약돌로 소반지어 언니누나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어릴 적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옛 도지사관사를 나와 바로 옆에 있는 향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600년도 넘은 청주 향교
서쪽으로 지는 해가 향교 마당과 대성전이 있는 언덕배기에 금빛 가루를 뿌린다. 돌담을 따라 눈길을 옮기면 그 끝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 담모퉁이에 서서 향교 마당을 굽어보고 있다.
나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잔디와 풀 희고 노란 꽃들이 피었다. 꽃시계 만들고 꽃반지 묶어 소꿉놀이하던 그 풀밭은 아직도 토끼풀 하얀 꽃이 태반이다. 목젖까지 그윽하게 차올랐던 황금빛 햇볕을 먹고 놀던 풀밭 그 자리에 30~40년 만에 다시 섰다.
바람 한 점, 스치는 풀 향기, 저녁밥 짓는 마을의 냄새까지 솜털 하나하나에 새기고 싶어 서성였다. 이곳은 내 추억 보다 오래 된 곳으로, 역사를 거슬러 가면 조선의 개국에 닿는다.
청주 향교는 조선 태조 때 지은 것으로 세종과 세조 등 조선의 왕들이 종종 찾았던 곳이다. 세종은 책을 하사했고 세조는 직접 제향을 올렸다. 숙종 때 현재의 위치로 옮긴 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39호다.
향교 주변 마을 저녁밥 짓는 향기를 따라 걷는다. 골목길을 새로 포장했는지 아스팔트가 새거다. 어릴 적에는 비 오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처마의 골 간격으로 길바닥이 옴폭 패였다. 오목하게 패인 그곳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어린 나이에도 울적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향교의 대성전에서 이름을 따서 만든 동네, 대성동. ‘크게 이룬다’는 뜻의 ‘大成(대성)’이라는 이름을 입은 마을이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1원 동전 몇 닢이면 사탕에 과자까지 사먹을 수 있었던 시절, 마을 구멍가게 좌판에 놓인 ‘라면땅’은 누런 코 훌쩍이며 먹던 지상 최고의 간식이었다.
구멍가게는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구멍가게 옆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마을 위로 올라간다. 빨래광주리 인 엄마 뒤를 졸졸 따라 갔던 마을 공동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 아줌마들이 모여 빨래방망이 후려치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 겨울 물을 깃던 빨개진 엄마의 손이 떠올랐다.
포도넝쿨 아래 사철나무 담장 위로 얼굴을 내민 해바라기가 있던 단칸 셋방 그 집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똥물 넘치던 그 해 여름 기억이 실 없는 웃음 웃게 하는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처마를 바라보았다. 비는 오지 않았고 시멘트로 골목길을 단장했지만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빗방울에 길바닥이 옴폭 패였던 추억의 풍경 한 토막을 꺼내어 그 처마에 널어놓고 마을 뒷동산으로 향했다.
두 팔 벌린 아버지의 품으로 달음박치던 어린 형과 내가 그곳에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셔야 했던 젊은 아버지와 한 달에 한 번 아버지를 봐야만 했던 어린 아이는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뒷동산 풀밭에서 한 품이 됐다.
뒷동산 언덕에 올라 노을 끼는 하늘을 본다. 옛날 모습 그대로의 마을과 저 멀리 청주 도심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모든 풍경을 감싸 안은 노을이 눈시울처럼 붉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